• [로컬 프리즘] 공무원 이름도 가리게 만드는 세상

    최모란 사회부 기자 전직 공무원 A씨는 악성 민원인에 시달리다 숨진 김포시 소속 공무원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 근무할 당시 악성 민원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민원인의 과도한 요청에 “안 된다”고 거절한 것이 시작이었다. 해당 민원인은 찾아오거나 전화로 욕설이 섞인 항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시청에 지속해서 “A씨가 불친절하다”는 민원을 넣었다. 시의원과 지역 언론에 A씨에 대한 거짓 내용을 제보하기도 했다. 각종 증빙 자료 등을 제출해 오해를 풀긴 했지만, 부정적인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여기저기로 퍼졌다. A씨는 “황당하고 억울했지만, 민원인에게 또 다른 빌미를 줄 것 같아서 제대로 대응도 못 했다”고 씁쓸해했다.   항의성 민원에 시달리다 숨진 경기도 김포시 공무원의 빈소가 지난달 7일 김포시청 앞에 마련됐다. [사진 김포시] 악성 민원으로 인한 피해는 A씨만의 일이 아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공무원에 대한 폭언·폭행·성희롱 등 불법 행위 건수는 4만1558건이다.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해 8월 21일부터 9월 8일까지 조합원 706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84%가 최근 5년 사이에 악성 민원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악성 민원으로 고통받다 숨진 공무원 사례가 이어지자 각 지자체는 속속 공무원의 이름과 연락처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김○○’처럼 성(姓)만 표시하거나, 아예 직급만 게시하는 방식이다. 사무실 입구에 비치된 조직도에서 공무원의 사진과 이름을 빼는 지자체도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김포시 등 50여 곳이 넘는 지자체가 공무원의 이름을 비공개로 바꾸거나 검토 중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공무원 이름까지 숨길까 싶지만, 일각에선 “모든 민원인을 잠정적인 악성 민원인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공무원들의 신상을 가리면 ‘책임 행정’이 아닌 ‘소극·무책임 행정’ 같은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런 우려를 의식해 경기도는 다음 달 도청 직원과 도민 여론조사를 통해 공무원들의 신상공개 범위를 정하기로 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직원들 사이에선 신상정보를 비공개하자는 여론이 많지만, 행정 기관 입장에선 도민 불편 최소화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여론조사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상정보 비공개가 악성 민원의 해결책이 될지는 의문이다. 홈페이지 등에서 이름을 가려도 다른 창구를 통해 얼마든지 담당 공무원의 신상 정보 파악이 가능하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25일 서울 동대문구 종합민원실을 방문해 “공무원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전한 민원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악성 민원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전임 장관들도 같은 얘길 했다. ‘뒷북’이나 ‘미봉책’이 아닌 제대로된 보호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모란 사회부 기자

    2024.05.01 00:20

  • [로컬 프리즘] 창원 산단의 DNA

    위성욱 부산총국장 반세기 전만 해도 경남 창원시는 허허벌판에 자연부락이 있던 농촌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1974년 4월  ‘창원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국내 기계산업의 메카’로 바뀌었다.   창원 산단이 가동된 1975년 44개였던 입주 업체는 현재 2965개(지난해 기준)로 약 67배 증가했다. 자동차·조선·우주항공·원자력·방산 등 기계산업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아기공(현대위아)·삼성정밀공업(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국중공업(두산에너빌리티)·현대차량(현대로템)·효성중공업 등이 있다.   2024년 경남 창원산단의 모습. [사진 경남도] 산단 면적도 커졌다. 최초 계획했던 13.16㎢에서 부산 영도(14.12㎢)의 2배가 넘는 35.87㎢로 늘었다. 생산액은 1975년 15억원에서 지난해 60조597억원으로 4만배나 급증했다. 경남 전체 산단 생산액의 56%에 해당한다.   하지만 경제·산업 구조가 급변하면서 창원 산단도 시설 노후화와 연구개발(R&D) 기능 약화라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최근에는 수도권 인구 집중 등의 영향으로 창원 산단 중소기업도 인력난에 허덕인다고 한다. 청년층 제조업 기피 현상도 한몫하고 있다. 실제 경남 청년(만 19~39세) 근로자가 해마다 1만명 넘게 수도권으로 이탈하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경남도와 창원시, 한국산업단지공단(산단공) 경남지역본부는 창원 산단 지정 50주년을 맞아 올해부터 10년간 국비 등 3조8000억원을 들여 창원 산단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변화의 핵심 키워드는 ‘디지털 전환’이다. 기존 제조업 생산·사무 공정의 디지털 전환뿐만 아니라 디지털 산업 육성에 나서겠단 취지다. 연구개발 역량도 한 곳으로 모은다. 창원대로와 접한 다른 부지에 2개 동·지상 30층 규모로 ‘R&D 커넥트 허브’를 조성해서다. 5644억원을 들여 오는 30년까지 기업부설연구소·창업보육센터 등을 중심으로 연구개발 기능도 집적화한다는 계획이다.   또 근로자의 문화·여가·스포츠와 업무 공간이 복합된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타운’을 2027년까지 조성하고, 기업과 협업해 산단 곳곳에 카페·독서 문화공간·어린이집 등 편의시설도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를 통해 창원 산단을 ‘경남 제조 디지털 혁신밸리’로 조성하겠다는 목표다. ‘임대료 100원 사무실·기숙사’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와 규제 개선으로 2000여 디지털 기업 유치가 목표다.   유럽의 실리콘 밸리와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며 디지털 산업단지 성공 모델로 손꼽히는 프랑스 그레노블과 중국 선전의 성공 사례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재육성과 지역 대학과의 산·학 협력 등을 통해 변화와 성공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여기다 지난 50년간 수차례 위기를 이겨낸 ‘창원 산단만의 DNA’가 제대로 접목된다면 창원 산단의 미래 50년도 어둡지 않아 보인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2024.04.24 00:18

  • [로컬 프리즘] 세월호 참사 10년 만에 문 연 해양안전관과 진도 주민들

    최경호 광주총국장 “진도에 가서는 웃지도 말라.”   올해 10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 후 전남 진도군 안팎에서 돌았던 말이다. 진도는 2014년 4월 16일 맹골수도 해상에서 탑승객 304명이 숨진 후 오랜 트라우마를 겪어왔다. 지금도 팽목항(진도항)을 찾은 추모객들은 10년 전을 회상하며 굳은 얼굴로 눈물을 훔치곤 한다.   진도 주민들은 “세월호”라는 말만 나와도 안색이 어두워진다. 참사가 발생한 곳이라는 이유 만으로 10년간 고통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세월호 침몰 후 선체가 인양될 때까지 죄인이라도 된 듯 숨죽여왔다”고 말한다.   전남 진도 팽목항 인근에 건립된 국민해양안전관. [연합뉴스] 참사 후 꽃게나 미역 등 진도산 수산물을 외면했던 사회 분위기도 주민들에겐 상처로 남았다. 사고 후 생업을 접고 승객 구조와 봉사활동에 나선 주민들로선 억울함을 넘어선 분노가 자리했다고 한다. 전남대병원 조사 결과 참사 3년 후까지 진도 주민 10명 중 2명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호소할 정도였다.   세월호 사고 후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긴 것도 주민들을 힘겹게 했다. 전국적인 관광지였던 진도군 곳곳의 숙박업소와 식당들이 참사 후 경영난에 직면했다. 진도군에 따르면 참사 후 어민과 상공인들이 대출받은 특별자금 270억원 중 절반 이상이 아직 상환되지 못한 상태다.   진도군은 참사 이후 ‘국립 국민해양안전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세월호의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주민들의 추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추모사업 일환이었다. “팽목항에 남은 컨테이너 분향소가 진도항 건립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여론도 사업 추진에 불을 댕겼다.   하지만 당초 2018년 준공 예정이던 해양안전관은 지난해 11월에야 완공됐고,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1월에야 정식 개관했다. 부지 매입과 설계용역, 공사비 확보 등의 절차가 지연된 결과였다.   해양안전관은 국비 270억원을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462㎡ 규모로 건립됐다. 팽목항에서 600m 거리인 시설에선 10여종의 안전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선박 침몰 및 기상재난 체험과 바다 생존법 등이 호응을 얻으면서 체험객이 늘고 있다.   진도군 안팎에선 “이젠 (해양안전관의) 운영비가 문제”라는 말이 나온다. 연간 운영비 25억원 중 40%(10억원)를 진도군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시설을 개관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해양안전관은 국가사업이 아닌 추모사업인 만큼 운영비를 지자체가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진도군은 “재정자립도 7%로 전국 최하위 수준인 지자체에서 매년 10억원을 감당하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추모사업 특성상 적자운영 가능성이 높은 것도 진도군과 주민들의 우려가 큰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세월호 기억공간이 운영비 때문에 또다시 차질을 빚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2024.04.17 00:22

  • [로컬 프리즘] ‘민생 소홀’과 현금

    김방현 내셔널부장 금권·관권 개입 논란은 선거 때마다 등장한다. 중앙 또는 지방 권력이 현금을 뿌리거나 선심성 정책을 노골적으로 내놓는 걸 말한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관권선거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 토론회를 연 것과 사전투표 첫날 부산을 찾은 것 등을 사례로 들었다. 윤 정부는 이것 말고도 몇 가지 현금 혜택성 정책을 내놨다. 소상공인 대출이자 1200억원 환급, 영화 관람료에 부과하던 입장권 부담금(관람료의 3%) 폐지 등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다.   2020년 5월 대전 지역화폐(온통대전) 출시 기념식이 열렸다. 지역화폐를 사용하면 일정 비율의 현금을 돌려준다. [사진 대전시] 왜 그런지는 문재인 정권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문 정권과 민주당이 장악한 지방 권력은 ‘역대급’으로 돈을 뿌렸다. 당시는 코로나19 사태 극복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있었다. 지역화폐(지역 상품권) 발행 등 코로나19와 직접 관련이 없는 현금 혜택도 많은 국민이 누렸다. 규모도 엄청났지만, 지급 방식도 윤 정부와 달리 피부와 와 닿게 했다. 바로 개인별 계좌 입금이었다.   대전시 재난지원금도 그중 하나였다. 대전시는 2020년 4~5월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을 나눠주면서 가용(可用) 재원을 거의 털었다. 정부 재난지원금 중 대전시가 부담해야 할 예산은 555억원이었다. 대전시는 재해구호기금과 예비비 등으로 이 돈을 마련했다. 또 민간보조사업비 일부를 삭감해 재난지원금으로 돌려쓰고, 그래도 모자라자 지방채까지 발행했다. 대전시는 당시 정부 재난지원금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대전형 긴급재난생계지원금을 별도로 지급했다. 여기에만 약 700억원을 썼다.   지역화폐도 현금 나눠주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지역화폐는 사용한 금액의 일정 비율(7~10%)을 현금(세금)으로 돌려주는 구조다. 대전시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지역화폐인 온통대전 예산으로 국비 등 4701억원을 투입했다. 지역화폐는 대전은 물론 전국 대부분의 자치단체가 도입했다. 몇 년간 해마다 국가 예산 수조원이 지역화폐에 쓰였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와 2022년 6월 국민의힘으로 교체된 지방 권력은 이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세금낭비 성격이 있어서였다.   윤 정부 집권 이후 “왜 재난지원금이나 지역화폐 같은 돈을 안 주냐”는 목소리가 퍼졌다. 일종의 금단현상 처럼 일단 현금 맛을 보면 끊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게 이번 총선의 ‘민생 소홀’ 논란을 더 달구었을지 모른다.   이런 가운데 문 전 대통령이 선거판에 갑자기 등장해 “칠십 평생에 이렇게 못하는 정부는 처음 본다”라며 윤 정부를 겨냥했다. 많은 사람이 문 전 대통령의 이런 행태를 비판했지만, ‘현금 나눠주기’ 만 놓고 볼 때 그의 주장이 그럴싸해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현금 포퓰리즘은 나라 살림살이와 국민정신을 망가뜨리지만 말이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4.04.10 00:30

  • [로컬 프리즘] 11년째 출몰하는 한강 하구 신종 유해 바다생물 ‘끈벌레’

    전익진 사회부 기자 실뱀장어 철을 맞아 요란해야 할 경기도 고양시 한강 하구가 요즘 조용하다. 실뱀장어의 천적이자 괴생물체인 ‘끈벌레’가 다시 대규모로 출현해서다. 이에 어부들은 연중 어획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실뱀장어잡이에 나서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매년 봄 11년째 반복되고 있지만, 퇴치 방법이 없는 가운데 피해 지역 마저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끈벌레는 2013년 한강 하구에 나타나면서 처음 보고된 신종 유해 바다 생물이다. 20∼30㎝ 길이로, 지렁이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실뱀장어는 끈벌레의 점액질에 노출되면 곧바로 폐사한다.   어부들은 올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지난달 말부터 조업에 나섰다. 하지만 올해도 그물에 가득 걸린 끈벌레로 인해 같이 잡힌 실뱀장어가 95% 이상 폐사하자 그물을 묶어 버렸다. 행주어촌계 어부 50여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봄철 실뱀장어 조업에 나서지 않았고, 20여명만 지난달 말 조업을 시작했지만, 며칠 사이 일손을 놓아 버렸다.   3월 26일 고양시 행주대교 인근 한강 하구에서 잡힌 ‘끈벌레’. 끈벌레 사이에 죽은 실뱀장어도 보인다. [사진 행주어촌계] 어부들은 행주대교 기점 한강 상류 6∼7㎞ 지점에 있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난지물재생센터와 서남물재생센터에서 한강으로 배출하는 방류수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한강 물길이 신곡수중보로 인해 가로막히면서 하수·분뇨처리장 2곳에서 배출되는 방류수가 정체되는 행주대교 일대서 끈벌레가 집중적으로 출몰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고 추정한다. 행주대교∼신곡수중보 2.5㎞ 구간에서 주로 출몰하는 점에서 더 그렇다고 본다.   하지만 서울시는 용역조사 결과에서 방류수 때문이 아닌 것으로 나온 만큼, 어부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하수처리장에서 방류 중인 하수 수질은 생화학적 산소 요구량(BOD) 농도 10ppm 이하로 매우 깨끗하게 정화된 상태라고 반박하고 있다.   행주어촌계는 5년 전 고양시의 용역조사에서 ‘높은 염도 등’ 때문이라는 원인 추정과 관련, 이는 낙동강 등 4대강 중 유일하게 한강하구에서만 끈벌레가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끈벌레 발생범위가 확산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신곡수중보 하류 수㎞ 이내 고양 신평과 김포 고촌 등 한강 하구에서도 수년 전부터 매년 봄 끈벌레가 출몰하기 시작한 뒤 점차 개체 수가 늘고, 어부들의 실뱀장어 조업 피해도 커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어부들은 하수처리장 2곳의 방류구를 신곡수중보 하류로 이전할 것까지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강 하구 수중 생태계의 안전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부들의 생계도 중요할뿐더러 국민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여서다. 국가하천으로 지정된 한강에서 11년째 되풀이되는 이상 현상에 대해 정부 차원의 재조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전익진 사회부 기자

    2024.04.03 00:35

  • [로컬 프리즘] ‘하인리히’와 어선사고

    위성욱 부산총국장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란 것이 있다. 큰 사고 1건이 일어나기 전 29건의 작은 사고와 300건의 사소한 징후가 나타난다고 해 ‘1:29:300’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재난 현장에서 교과서처럼 인용되는 이론이다. 1931년 미국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윌리엄 하인리히가 7만5000건의 재난사고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다.   최근 경남 통영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반복되는 어선 전복과 침몰 사고를 보면서 이 법칙이 떠올랐다. 본격적인 조업이 이뤄지는 봄에 이렇게 자주 어선 관련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어쩌면 안전 조업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는 전조 증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해상 어선 전복·침몰 사고 이미지. [연합뉴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서 이런 의문은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7일 오전 2시 44분 경북 포항 구룡포읍에서 120㎞ 떨어진 해상에서 연안 통발어선(9.77t)이 전복됐다.   당시 바다에는 2.5~3m 높이 파도가 쳤고, 풍랑 예비특보도 사고 하루 전인 16일 오후 4시에 내려졌다. 하지만 10t 미만 소형 ‘연안’ 어선인 이 배는 홍게(붉은 대게)를 잡으려고 ‘원거리 조업’에 나섰고, 보통 40~50t 되는 선박이 운항하는 먼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   지난 9일 오전 경남 통영 욕지도 남쪽 68㎞ 해상에서 뒤집어진 채 발견된 근해연승어선(20t)도 궂은 날씨 속에 조업을 했다. 통영 해경은 사고 추정 시각을 이 배의 항적 기록이 끊긴 전날(8일) 오후 8시 55분 이후로 보는데, 약 14시간 전인 이날 오전 7시부터 욕지도 인근 해상에는 풍랑주의보가 발효됐다. 비슷한 시각 최고 4.8m 높이 파도와 초속 14m 강풍이 불었던 것으로 관측됐다.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 서쪽 20㎞ 바다에서 전복된 갈치잡이 근해연승어선(33t)도 사고 당시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풍랑주의보가 발효되면 15t 미만 어선은 출항할 수 없지만, 이들 사고 선박처럼 15t 이상이면 2척 이상이 선단을 꾸려 조업할 수 있다. 태풍주의보·태풍경보·풍랑경보 때 모든 어선은 출항이 금지되지만, 이런 기상특보가 발효되기 전 예비특보 때에는 출항 금지나 대피 명령을 권고만 할 수 있다.   지난 14일 오전 4시 20분쯤 통영 욕지도 남쪽 8.5㎞에서 발생한 쌍끌이 대형 저인망어선(139t) 침몰 사고는 조업한 정어리 40t을 어창(魚艙)이 아닌 선미 갑판에 그물도 풀지 않은 채 쌓아두고 운항 하다 사고가 난 것으로 해경은 추정하고 있다.   사례별로 정확한 사고 원인은 해경의 추가 조사가 있어야겠지만 곳곳에서 드러난 정황만 보면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악천후 출항 등 무리한 조업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해마다 조업철에 이런 사고가 반복된다면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2024.03.27 00:18

  • [로컬 프리즘] “통합의대냐 단독의대냐”…윤 대통령이 불 댕긴 ‘전남 의대’ 논쟁

    최경호 광주총국장 “전남지역 대학교 두 곳의 통합 의과대학 설립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김영록 전남지사가 지난 1월 25일 목포대와 순천대가 단일 의대 설립 방안에 합의한 직후 한 말이다. 그는 두 대학교의 공동 의대 설립에 환영의 뜻과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전남지역의 의대 신설은 양 대학을 필두로 1990년대부터 추진됐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명칭부터 생소한 ‘공동 의대’는 전남에 의대를 세우려는 고육지책이다. 두 국립대가 힘을 합쳐 광역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의대가 없는 전남의 의료기반을 확충하겠다는 취지다. 목포대와 순천대는 각각 전남 서부와 동부에 의대 설립을 추진해오다 올해 들어 통합 의대에 합의했다.   김영록 전남지사 등이 지난 1월 25일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남지역 의과대학 유치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립 의대 설립은 전남 정치권에서도 목소리를 높여온 현안이다. “필수·공공의료 기반 확충 차원에서라도 의대를 신설해 달라”는 주장이다. 지난해 10월 18일에는 민주당 국회의원들과 서동욱 전남도의회 의장 등이 국회 앞에서 의대 설립을 요구하는 삭발식을 열기도 했다.   김 지사는 공동 의대 합의 후 “전남은 사실상 의료공백 상태”라며 캐나다 노던 온타리오 의대를 롤모델로 제시했다. 통합 의대의 성공 모델로 꼽히는 캐나다 사례처럼 전남 서부와 동부에 공공 의대를 설립하겠다는 취지다. 노던 온타리오 의대는 1000㎞ 거리의 서부캠퍼스와 동부캠퍼스에 각각 의대를 운영하고 있다.   30여 년간 지지부진했던 전남지역 의대 설립은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전남도청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전남 의대 신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최근 의료 대란 속에서 나온 대통령의 발언은 전남지역 의대 설립의 청신호처럼 여겨졌다.   전남도는 윤 대통령의 발언 닷새 만인 지난 19일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 ‘전남 국립 통합 의대 신설’을 정식 건의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2025학년도 의대 정원 2000명 증원계획에 전남 의대 신설을 포함해 달라는 게 골자다.   하지만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논쟁이 불거졌다. 순천시와 순천대 등이 통합 의대 추진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나서면서다. 순천대 등은 윤 대통령의 발언 중 ‘의견 수렴’ 부분을 강조하며 단독 의대 쪽으로 유치 방향을 바꿨다. 윤 대통령은 민생토론회 당시 “국립 의대 (신설) 문제는 어느 대학에 할 것인지 전남도가 정해서, 의견 수렴해서 알려주면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남도는 윤 대통령이 의대 신설의 길을 열어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새다. 이번에 불거진 공동, 혹은 단독 의대 논쟁을 넘어서 어떻게든 의대를 유치할 방법을 찾겠다는 입장도 연일 밝히고 있다. 전남도가 여러 논쟁 속에서 의대 설립을 이끌어낼 솔로몬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2024.03.20 00:22

  • [로컬 프리즘] 투표 직전 재난지원금과 민생토론회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0년 4·15총선이 끝나자마자 전국에서 선거 무효 소송이 잇달았다. 그중에서도 대전지역 출마자들이 가장 발 빠르게 대응했다. 소송은 대전 서구·유성구 등에서 출마한 장동혁(국민의힘 사무총장)·양홍규·김소연 변호사 등 법조인이 주도했다. 이들은 이번 총선에서 공천에 탈락했거나 대전과 충남 등 지역구에 출마한다. 김 변호사 등은 선거 무효 소송을 두 갈래로 진행했다.   먼저 “투·개표 과정에 불법적 요소가 있었고, 투표지 분류기 오류 등으로 당선자가 뒤바뀐 것 같으니 재검표해달라”고 했다. 부정선거 의혹 제기였다. 당시 대전 동구 개표소에서 봉인용 잠금장치가 없는 투표함이 발견되는 등 개표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장면이 속출했다. 이후 전국의 많은 출마자가 동참하면서 4·15총선 무효 소송은 120여건으로 늘었다. 무효 소송을 발판으로 한 선거 공정성 확보 노력은 투·개표 시스템에 일부 변화를 몰고 왔다. 중앙선관위는 이번 총선에서 사전투표함 보관 장소를 CCTV로 24시간 공개하고 사전 투표용지에 QR코드 대신 바코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공직선거법상 QR코드 사용은 불법이다. 하지만 선관위는 한동훈 비대위원장 등이 요구한 사전투표용지 투표 관리관 직접 날인은 거부하고 있다. 공직선거법대로 투표 관리관이 직접 날인하는 게 왜 시행되지 못하는지 선관위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인천시 남동구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2024년 신형 투표지분류기를 모의시험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다른 선거 무효 소송은 ‘금권 선거’ 관련 내용이다. 장동혁 후보 등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소속 단체장이 있는 대전광역시와 유성구가 코로나19를 핑계로 긴급재난생계지원금 등 현금을 투표일 직전에 뿌렸다”며 “이는 금권·관권선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대전시는 당시 투표 이틀 전인 4월 13일 대전형 긴급재난 생계지원금(30~70만원)을 줬다. 아동양육한시지원금도 주로 투표일 직전에 지급했다. 문재인 정부가 7세 이하 자녀를 둔 가정에 나눠준 돌봄쿠폰(40만원)이었다. 이는 투표 바로 전날  동사무소에서 현금을 주며 “내일 꼭 투표하세요”라고 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2021년 8월 “재난지원금 지급은 공직선거법상 기부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연초부터 민생토론회를 핑계로 선심성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며 “민주화 이후에 이렇게 대놓고 관권선거를 획책한 대통령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정권 교체로 여야 공수(攻守)가 뒤바뀐 상황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투표일 직전에 현금을 준 것도 괜찮다고 한 마당에 정책을 내놓는 민생토론회가 무슨 문제인지 의문이다. 그나마 이번에는 투·개표 절차가 일부 개선되고 현금을 나눠 준다는 말은 들리지 않아 다행이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4.03.13 00:20

  • [로컬 프리즘] 의정비 인상만 한몸인 지방의회

    최모란 사회부 기자 “의정활동비 인상에 반대합니다.”   지난달 19일 오전 경기도의회 본회의장. 단상에 오른 국민의힘 박명원(74·화성2) 의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박 의원은 “도의원의 연간 월정수당과 의정활동비는 이미 도내 근로소득자의 평균 연봉을 상회하고 있다”며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해 의정활동비 인상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2023년 지방의회 종합청렴도 평가에서 도민의 기대에 닿지 못하는 결과(경기도의회는 최하위인 5등급을 받음)가 나온 만큼 의정활동에 소홀했던 의원들, 특히 민생현안 해결에 필요한 상임위 활동을 방해했던 의원들은 의정활동비 반납을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고 쓴소리했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는 지난달 21일 대구시의회 앞에서 시의원들의 의정활동비 인상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스1] 노(老) 의원의 고언에도 경기도의회는 같은 달 29일 의정활동비를 월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인상하는 조례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재석 의원 99명 중 96명이 찬성했다. 반대는 1명, 기권은 2명이었다. 박 의원은 “도민들이 만족할 만한 의정활동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정활동비를 인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반대 의견을 냈는데 오히려 항의하는 의원들도 있었다”며 씁쓸해했다.   요즘 지방의회의 공동 관심사는 의정활동비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말 지방의원의 의정활동비 지급 한도를 인상하는 지방자치법 시행령을 개정한 이후 각 광역·기초 의회들이 기다렸다는 듯 의정비를 인상하거나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광역·기초 의원의 의정활동비를 상향 조정(광역 월 150만원에서 200만원 이내, 기초 월 110만원에서 150만원 이내)하는 내용이다.   서울시의회와 강원도의회, 울산시의회 등이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인천시의회 등이 추진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방의회 의원의 충실한 의정활동 유인체계를 마련하고, 유능한 인재의 지방의회 진출을 위해 의정활동비 인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각 광역·기초 의회도 지난 20여년 동안 한 번도 의정활동비를 올리지 않아 ‘충실한 의정활동을 위한’ 현실화가 필요하다며 찬성한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지방의원이 하는 일이 없다”는 불신이 크다. 주민보다 지역 국회의원과 소속 정당을 더 섬기고, 여·야 갈등으로 인한 의회 파행이 속출해서다. 여기에 잊을만하면 음주운전·갑질·폭행·막말에 낯뜨거운 성비위까지 개인 비리가 이어진다. 지난 1월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2023 종합 청렴도 평가 결과에서도 지방의회의 종합 청렴도는 100점 만점에 평균 68.5점으로 매우 낮았다. ‘무용론’마저 나오는 상황에서 잇속 챙기는 일에만 단합하니 좋게 보일 리 없다.   박 의원은 “의정활동비 인상에 앞서 의원들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흘려듣지 말아야 할 충고다. 최모란 사회부 기자

    2024.03.06 00:20

  • [로컬 프리즘] 요동치는 ‘낙동강 벨트’

    위성욱 부산총국장 낙동강은 한강·금강·영산강과 함께 우리나라 4대강 중 하나다. 지금처럼 도로와 철도 등 육상 교통망이 발달하기 이전 수천 년 동안 한반도 남쪽에서 해양과 대륙의 문명 교류를 잇는 젖줄 역할을 해와 ‘영남의 젖줄’로도 불린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이었던 낙동강은 연합군의 최후 방어선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낙동강은 선거 때면 ‘낙동강 벨트’라는 말로 자주 변용된다. 낙동강 벨트는 부산 북·강서구와 사상구·사하구, 경남 김해·양산시 등 낙동강을 끼고 있는 9개 선거구를 의미하는데 이곳에서 선거 때마다 보수와 진보 진영 간에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양산을에서 맞붙는 김태호·김두관(아래 사진) 의원. [연합뉴스] 이곳은 과거 영남권 다른 지역구와 마찬가지로 보수정당이 우세했다. 하지만 김해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한 뒤 2009년 5월 서거하는 정치적 과정을 겪으면서 표심에 변화가 일었다. 양산시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전 살았고, 퇴임 후에 거주하면서 현재 김해와 양산은 진보 진영의 성지로 여겨진다. 21대 총선에서 ‘낙동강 벨트’ 9개 지역구 중 국민의힘이 4곳, 더불어민주당이 5곳에서 승리한 배경이다. 여·야 모두 “방심하면 뺏긴다”는 위기의식이 그 어느 지역구보다 높다.   이번 22대 총선에서도 ‘낙동강 벨트’는 전국 최대 격전지가 됐다. 최근 국민의힘이 서병수·김태호·조해진 등 굵직한 중진 의원들을 ‘낙동강 벨트’로 전진 배치하면서다. 이들은 모두 ‘당의 승리’를 위해 자신들의 지역구를 뒤로 한 채 민주당 현역 의원들이 지키고 있는 낙동강 전투 참전을 받아들였다.   양산을에서 맞붙는 김태호(위 사진)·김두관 의원. [뉴스1] 이 중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은 과거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8전 7승’을 기록한 국민의힘 김태호 의원이 참전하는 양산을 선거구다. ‘이장 출신 금배지’ 신화를 앞세운 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지키고 있는 양산을에서 주목받는 중량급 여야 의원들의 정면 승부가 성사된 것이다. 이들 모두 경남도지사를 역임했다는 공통 이력도 있어 승패에 대한 전망은 벌써 관심사다.   이 외에도 양산갑은 현역인 국민의힘 윤영석 의원과 민주당 이재영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김해을은 국민의힘 조해진 의원과 현역인 민주당 김정호 의원, 부산 북·강서갑은 부산시장을 지낸 국민의힘 서병수 의원과 재선의 전재수 의원, 부산 북·강서을은 현역인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과 민주당 변성완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 부산 사하갑은 국민의힘 이성권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과 민주당 현역 최인호 의원 등 곳곳에서 빅매치가 치러진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여·야의 희비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떤 후보가 참 일꾼인지 유권자들이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면 선거가 끝난 뒤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건 유권자라는 점이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2024.02.28 00:22

  • [로컬 프리즘] “섬마을 빈집 없애겠다”…26세 MZ세대 여성 이장의 꿈

    최경호 광주총국장 “미래 목표요? 완도를 제2의 제주도로 만들고 싶어요.”   2년 전 전국 최연소 이장이 된 김유솔(26·여)씨가 20일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24세 때인 2022년 1월 전남 완도군 용암마을 이장이 된 후 올해 재신임을 받았다. 마을 주민들이 만장일치로 1년 임기의 이장을 재추대한 결과다.   김씨는 주민 평균 나이가 68세인 용암마을에선 귀여운 손녀이자 민원 해결사로 통한다. 이장의 고유 업무 외에도 마을 경조사나 각종 민원을 도맡아 처리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휴대전화가 고장 나거나 컴퓨터를 사용할 일만 생겨도 김씨부터 찾곤 한다.   전남 완도군 청년공동체인 ‘완망진창’을 주도하고 있는 김유솔 이장(왼쪽에서 셋째). [사진 완망진창] 김씨는 서울에서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다 2019년 2월 고향인 완도로 돌아왔다. 외갓집이 있던 용암마을 인근 마을에 ‘솔진관’이라는 사진관을 연 게 시작이다.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장수 사진 촬영 봉사 등에 참여한 게 마을 어르신들의 눈에 띄었다.   3년 차 이장인 김씨가 올해 세운 목표는 도시재생이다. 지난 2년간 동료들과 해왔던 청년공동체 사업을 확장하는 형태다. 그는 이장일을 하는 틈틈이 ‘완망진창’이란 공동체를 주도해왔다. 완망진창은 완도와 엉망진창을 합친 말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완망진창은 타 지역이나 고향을 떠난 청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2022년 1월 결성됐다. 김씨와 완도에 사는 청년 3명이 도시재생과 완도 알리기 등을 통해 지방소멸에 맞서왔다. 올해는 김민우(25)·김유진(24·여) 씨 등과 함께 ‘완도 한 달 살기’와 빈집 리모델링 사업 등을 추진한다. 앞서 읍내의 빈집 3가구를 리모델링해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선 청년 3명이 완도에 정착했다.   김씨는 용암마을에서도 도시재생 사업을 해볼 계획이다. 마을에 있는 20여 채의 빈집을 철거하거나 리모델링해 청년 등에게 제공하는 게 목표다. 김씨는 “완망친창이 알려진 후 집을 구하거나 창업을 문의하는 전화가 매달 20건 이상 오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고향을 제2의 제주도로 가꾸기 위해선 관계인구 형성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3년 안에 완도와의 관계인구 1000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관계인구는 특정 지역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잠재적인 이주·정착 가능 인구를 의미한다.   김씨는 “2년여 동안 150여 명의 관계인구가 형성된 상황”이라며 “이주 의사가 있는 분이 생기면 주거와 창업 등을 돕거나 리모델링 방식 등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완도로 돌아온 계기를 묻는 말에 “새롭게 발견한 고향 바다의 매력”이라고 답했다. 어릴 적 숱하게 접했던 바닷가 풍광이 커서 보니 제주보다 좋아 보였다는 취지였다. 그가 고향을 떠난 친구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어떤 매력적인 비전을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2024.02.21 00:20

  • [로컬 프리즘] 세종시와 노무현·박근혜

    김방현 내셔널부장 세종시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국가지도자로는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세종시가 지금처럼 ‘행정수도’ 면모를 갖춰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종시에는 현재 40여개 정부부처가 입주했고, 국회 분원과 대통령 집무실 설치도 추진 중이다.   세종시 건설은 2002년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충청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세종시는 몇 차례 위기를 맞았다. 2008년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 때가 큰 고비였다. 그는 행정도시 대신 교육과학중심도시(경제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에 충청권이 반발하는 등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이 상황을 정리한 인물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2010년 6월 29일 박근혜 의원은 국회에서 “(행정도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며 경제도시를 반대했다. 이에 친박근혜계 의원 50명이 뜻을 같이하면서 이명박 대통령 계획은 무산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친필 휘호가 새겨진 표지석. 2015년 7월 1일 세종시청사 개청을 기념해 세웠다. [중앙포토] 그래서인지 세종시에는 노무현·박근혜 대통령 흔적이 눈에 띈다. 세종시 호수공원에는 노무현 기념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한 조형물 등이 있다. 정치인들이 주로 선거 때 이곳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반면 박 대통령 기념물 등은 수난을 당했다. 박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한 게 발단이었다. 세종시청사와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는 박 대통령 친필 휘호 표지석이 있다. 2015년 7월과 2016년 1월 각각 세운 이들 표지석은 2019년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시민단체 등이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은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기록관에 있는 대통령 초상화도 박 대통령 탄핵 이후 2년 넘게 설치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표지석은 보존하고, 초상화를 빨리 설치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몇 차례 쓴 적이 있다. 다행히 표지석은 철거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을 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최근 삼성그룹 부당합병 의혹,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 잇달아 무죄가 선고된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들 사건은 박 대통령 탄핵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도 지난 5일 『박근혜 회고록: 어둠을 지나 미래로』 출간을 기념하는 북 콘서트를 여는 등 명예회복에 나선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북 콘서트에서 “재임 중 실수는 있었을지라도, 의도적으로 국민 앞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당당했다”고 말했다. 이제 많은 국민도 당시 탄핵 사태는 극단적인 생각에 휩쓸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시 건설 과정에서 본 것처럼 진영이 상반된 정치세력이라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4.02.14 00:22

  • [로컬 프리즘] 하동 칠불사 ‘아자방’

    위성욱 부산총국장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에는 지은 지 1000년이 넘은 ‘전설의 구들’이 있다. 구들은 우리나라 전통 한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난방시설로 온돌로도 불린다.   쌍계사에서 11㎞를 더 올라가면 칠불사가 나타나는데, 대웅전 왼쪽에 이 구들이 있는 아자방지(亞字房址)가 있다. 아자방지는 스님이 수행하던 온돌방과 방 구들에 열을 공급하는 아궁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곳이 지난해 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관심이 더 커졌다.   7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아자방 내부 모습. [사진 하동군]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897∼912년) 때 ‘구들 도사’라 불리던 담공선사가 이중 온돌 구조로 처음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자방이라는 이름은 독특한 방 모양 때문에 붙었다. 방은 길이가 8m인 직사각형 모양이다. 여기에 바닥에서 45㎝ 높이 좌선대가 마련돼 있다. 이 구조가 ‘아(亞)자’를 닮아 아자방이라 불린다. 방을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스님들이 좌선대에 올라 면벽 수행을 하다 바닥으로 내려와 다리를 풀고 쉬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짐작한다.   도응 주지 스님은 “아자방은 대웅전에서 온돌방만 보면 버금 아(亞)자 모양이지만 방 왼쪽에 입구(口)자 모양의 큰 아궁이(부엌 부분)가 있어 벙어리 아(啞)자로 보이기도 한다”며 “이 방에서 수행하는 스님이 묵언하며 올곧게 정진하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선 조능·벽송·서산·부휴·초의·월송 선사 등 수많은 고승이 수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을 수행하는 스님들이 ‘꿈의 수행처’라 부르는 이유다.   특히 아자방은 한 번 불을 때면 ‘석 달 열흘’ 즉, 100일간 온기가 골고루 유지된다고 알려져 그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천 년의 비밀, 아자방 온돌』이라는 책을 쓴 김준봉 국제온돌학회 회장은 “아자방 아궁이는 서서히 오래 열기를 공급하고 구들과 고래(불길과 연기가 움직이는 길) 두께나 형태 등도 다른 온돌과 달라 오랫동안 열기를 품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자방은 우리 온돌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수난도 많았다. 아자방 건물은 1949년 불에 탄 뒤 1982년 대부분 복원됐지만, 온돌 바닥은 복원이 되지 않았다. 그 뒤 3차례 문화재청 등의 발굴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부터 온돌 등 아자방지에 대한 복원 공사가 시작됐고 최근에야 옛 모습을 되찾았다.   칠불사 측은 아자방이 국가민속문화재가 된 것을 기념해 7일부터 부처님 오신 날(5월 15일)까지 약 3개월간 내부를 개방한다. 아자방 내부를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곳이 ‘면벽’(面壁)과 ‘묵언’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한국 사찰의 대표적인 수행처가 되기를 기대한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2024.02.07 00:22

  • [로컬 프리즘] ‘서울 편입’ 놓고 혼돈에 빠진 구리시·시의회

    전익진 사회부 기자 경기 구리시의회가 시끄럽다. 여(국민의힘)·야(더불어민주당) 시의원들이 맞서고 있다. 여기에 구리시의회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과 구리시까지 대립하고 있다. 구리시의 ‘서울 편입’ 문제를 놓고서다.   먼저 민주당 시의원들이 기초자치단체장이 국민의힘 소속인 구리시(백경현 시장)에 포문을 열었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 5명은 지난 24일 성명을 내 서울시 편입과 동시에 경기도 산하 최대 공기업인 경기주택도시공사(GH)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해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인다며 백 시장을 비판했다. 백 시장이 국민의힘 뉴시티 특위에 구리-서울 통합 특별법 발의를 요청해 GH의 구리 이전에 제동이 걸렸다고 주장한다.   구리시의회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 5명이 24일 ‘서울 편입’ 추진은 졸속 행정이라며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 구리시의회] GH는 앞서 지난해 11월 구리시에 공식 입장을 묻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구리시는 ‘공식적인 행정절차가 진행되지 않아 GH 이전을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회신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은 GH 구리 이전을 무산시키면서까지 서울 편입을 추진할 것인지 분명한 태도를 밝히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국민의힘 뉴시티 특위가 추진했던 서울 편입 특별법이 폐기 수순에 접어들면서 ‘총선용 졸속 정책’의 피해가 고스란히 해당 시민에게 돌아가게 됐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자 구리시가 즉각 반박에 나섰다. 김완겸 행정지원국장은 지난 25일 정례 브리핑에서 구리시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들이 가장 원하는 방향으로 서울시 편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시민을 오도하는 성명을 바로잡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총선 이후에도 결과와 상관없이 서울 편입을 서울시와 지속해서 추진하기로 의견을 나눴다고 강조했다.   지난 28일엔 구리시의회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 3명이 논란에 뛰어들었다. 여론조사를 통해 시민 약 68%가 희망하는 것으로 확인된 ‘서울 편입’을 인기 영합성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논리가 부족하고 근거도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울 편입을 바라는 시민 염원을 무시한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의 사실 왜곡·날조를 규탄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기도는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설치를 강력하게 추진 중이어서 시민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도는 경기북부 발전을 위한 전담 조직을 운영 중이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지난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에서 ‘북부특별자치도 설치 공통공약 운동’을 전개하겠다.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렵다. 구리시와 시의회는 지역 주민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와 지역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할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수렴해야 한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최우선에 두고 여야를 떠나 즉시 매달려야 한다. 전익진 사회부 기자

    2024.01.31 00:11

  • [로컬 프리즘] 흑사병보다 센 저출산 불똥, 정치권으로 튀었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한국의 인구감소 속도가 중세 유럽의 흑사병시대보다 빠르다.”   지난달 2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 내용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0.77명)이 흑사병 당시의 인구 감소를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글이었다. ‘한국은 소멸하고 있나’라는 제목의 로스 다우댓의 칼럼은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외신까지 우려한 저출산의 그늘은 현장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육시설 붕괴로 시작된 저출산 여파가 교육·국방·산업현장 전반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대한민국 주민등록 인구는 5132만5329명으로 4년 연속 줄었다.   저출산 여파로 지난해 폐교된 뒤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 전경. [뉴시스] 저출산의 공포가 가장 먼저 손을 뻗친 곳은 전국 보육시설이다. 어린이집 원생이 사라지면서 매년 2000곳 이상 문을 닫고 있다. 2012년 4만2572곳이던 어린이집은 2022년 3만923곳으로 10년 새 27%(1만1649곳) 줄었다. 폐업 규모도 2020년 2019곳, 2021년 2106곳, 2022년 2323곳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이 과정에서 손주가 다니던 어린이집이 할머니·할아버지가 다니는 노인시설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보육시설이 줄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는 교사·운전기사 등도 급증하는 추세다. 어린이집 원장이 요양원 원장이 되고, 무용학원 원장이 장례지도사가 되는 사례도 등장했다. 노인센터에 남겨진 궁전 모양의 유치원 건물과 놀이터엔 저출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록적인 영유아 감소는 학령인구 급감을 초래했다. 초저출산 여파로 올해 초등학교 입학생이 사상 최초로 30만 명대로 떨어졌다. 현재 추세면 2년 뒤인 2026년 입학생은 20만 명대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커지면서 장례식장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 결혼식장도 생겨났다.   국방 부분에도 비상이 걸렸다. 2018년 61만8000명이던 국군 상비병력은 지난해 50만 명대로 떨어졌다. 미국 CNN은 최근 한국 군(軍)의 새로운 적(敵)으로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꼽기도 했다.   저출산의 불똥은 정치권으로 튀었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저출산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신혼부부에게 10년 만기로 1억원을 대출해주는 공약을 내놨다. 첫째를 낳으면 이자 감면, 둘째를 낳으면 원금 50% 감면, 셋째를 낳으면 전액을 감면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은 육아휴직 급여를 월 60만원으로 올리고, 아빠의 한 달 유급휴가를 의무화하겠다고 공약했다.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은 ‘헝가리 모델’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면 2억원을 1%대 금리로 대출해준 뒤 자녀 1명을 낳을 때마다 3분의 1씩 원금을 탕감해주는 모델이다. 전문가들조차 찬반이 갈리는 지원책들이 외신들의 우려를 기우(杞憂)로 바꿀지 주목된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2024.01.24 00:12

  • [로컬 프리즘] 이승만, 그리고 일론 머스크의 사진

    김방현 내셔널부장 세계 역사에서 건국 대통령치고 이승만 만큼 폄하된 인물도 드물다. 이 전 대통령은 기념관도 없고, 동상도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1달러 지폐에 나오고 수도 등 150여 개 지명에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국내 몇 안 되는 이 전 대통령 동상도 수난을 당해왔다. 대전 배재대 졸업생들은 1987년 동문 대 선배인 이 전 대통령 동상을 캠퍼스에 세웠다. 배재대는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서울 정동에 설립한 배재학당이 모태다. 배재학당 대학부는 1925년 폐지됐다가 1980년 대전에 캠퍼스를 만들면서 부활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세 때인 1894년 배재학당 영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 동상은 철거와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다. 좌파 시민단체 등이 “독재자 흔적을 지워야 한다”며 문제 삼아서다. 2018년에는 대전 시의회까지 나서 철거를 요구했다. 당시 대전시의원 22명 가운데 21명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다. 인천 인하대에 있던 이 전 대통령 동상은 1984년 운동권 학생들 때문에 철거된 이후 창고에 보관 중이다.   대전 배재대 캠퍼스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 동상도 몇 차례 철거와 복원을 되풀이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그런데 요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국내외에서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운동과 함께 기념관이나 동상 건립 추진이 잇따르고 있다. 국가보훈부가 지난해 3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한 게 기폭제가 됐다. 기념관 건립 기금 모금에는 윤석열 대통령부터 일반 시민까지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있다.   모금 운동은 부산 등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지난 5일에는 부산지역 주요 인사 400여명을 주축으로 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부산광역시 추진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들은 이승만 바로 알기 캠페인과 강연·포럼·토크쇼 등을 하며 기념관 건립 기금을 모을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 독립 유공자를 선양하기 위해 시작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이 전 대통령이 뽑힌 것은 처음이다. 이에 민주당은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독재자”라며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아직도 이 전 대통령을 폄하하는 세력이 많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절대적인 공(功)이 있다. 북한과 정반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끈 점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2023년 마지막 날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보여줬다. 그는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한반도의 밤 이미지를 공유했다. 머스크는 ‘낮과 밤의 차이(Night and Day Difference)’라는 제목과 함께 ‘미친 발상(Crazy Idea): 한 나라를 자본주의 반, 공산주의 반으로 나누고 70년 후에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 보자’는 글을 달았다. 건국 대통령 평가는 이 사진 한장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4.01.17 00:21

  • [로컬 프리즘] 터미널의 추억

    최모란 사회부 기자 경기도 평택시 지산동 773-1번지. 평택 북동쪽을 일컫는 ‘송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였다. 1989년 문을 연 송탄시외버스터미널 때문이었다. 서울과 인천, 고양·성남·오산 등 수도권은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 호남권을 오가는 19개 노선버스를 타기 위해 하루 평균 1200여 명이 몰렸다. 승객들을 위한 식당 등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터미널 인근은 자연스럽게 번화가가 됐다. 이후 송탄 사람들의 약속 장소는 ‘터미널 앞’으로 통했다. 여느 중소도시의 터미널과 마찬가지로 만남의 장소가 된 거다.   이런 송탄시외버스터미널이 34년 만인 지난 1일 문을 닫았다. 버스가 들어오던 승강장은 텅 비었고, 환하던 대합실엔 불이 꺼졌다. 본인을 ‘송탄 토박이’라고 소개한 한 시민은 “추억이 사라지는 느낌”이라며 아쉬워했다.   1989년 개장한 경기도 평택 송탄시외버스터미널이 지난 1일 폐업했다. 대합실 한쪽에 의자가 뒤집힌 채 쌓여 있다. 장서윤 기자 터미널의 추억이 사라진 곳은 평택 송탄만이 아니다. 지난해 1월과 5월엔 경기도 고양 화정터미널과 성남시외버스터미널이 폐업했다. 같은 해 11월엔 서울 상봉터미널이 문을 닫았다. 2018년부터 최근까지 전국 버스터미널 326곳 중 31곳(9.5%)이 없어졌다. 어떤 이에겐 인생의 출발이었고, 또 다른 누구에겐 고향으로 돌아오는 종착역이었을 터미널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원인은 승객 감소로 인한 적자다. 전철과 KTX, 수서고속철도(SRT) 등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코로나19 이후 여객 수요가 격감하면서 버스 노선이 줄었다.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시외버스(직행 및 일반) 승객은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50.1%가 감소했고, 고속버스 승객도 41.3% 줄었다. 민간 터미널 운영사로선 경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평택시 관계자도 “팬데믹 이후 19개였던 버스 노선이 10개로 줄고, 하루 평균 승객 수도 100여 명으로 감소하면서 송탄터미널을 운영하던 민간 업체가 매년 1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폐업 이유를 설명했다.   터미널 부재의 후유증은 지역 주민이 감당해야 한다. 지자체마다 불편을 막는다며 임시 정류장을 마련했지만 대기 공간 부족, 화장실 문제 등 새로운 민원을 낳았다. 주변 상권도 함께 죽는다. 성남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터미널 폐업 이후 매출이 80% 가까이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경기도 가평군이나 전북 임실군, 전남 광양시 등 일부 지자체는 폐업한 버스터미널을 인수해 직영·위탁 운영에 나섰다. 하지만 마냥 혈세를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 전문가들은 “터미널을 거점 위주로 통폐합하고, 폐지하는 터미널 부지는 도시개발로 다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내와 연애할 때 여기서 만났어요. 내 청춘도 같이 사라지는 것 같네요.” 송탄 터미널에서 만난 한 남성의 말이다. 터미널이 더는 추억에 머물지 않도록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모란 사회부 기자

    2024.01.10 00:21

  • [로컬 프리즘] ‘사건 브로커’ 재판 쟁점된 배달사고…‘휴대폰 장부’ 판도라 상자 열리나

    최경호 광주총국장 “1500만원, 배달사고 난 것 맞죠?”   ‘사건 브로커’ 성모(62)씨 재판이 열린 지난 5일 광주지법 202호 법정. 성씨의 변호인이 증인으로 출석한 탁모(44)씨에게 한 말이다. 성씨에게 건넨 돈을 탁씨 동생(41)이 중간에서 챙긴 것 아니냐는 취지의 말이었다. 브로커 성씨는 코인 사기범 탁씨에게 검·경 수사무마 청탁과 함께 18억545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탁씨는 성씨 측 질문에 “(1500만원은) 동생이 아닌, (성씨의 공범) 전씨가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이 건넨 돈이 브로커 성씨 측에 모두 전달됐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성씨에게 준 돈이 하도 많아서 무슨 사건인 줄 알아야 답변을 할 수 있다”라고도 했다.   검찰이 광주경찰청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뉴시스] 전직 치안감의 사망 후 불거진 ‘사건 브로커’ 재판이 배달 사고 논란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성씨가 2020~2021년 돈만 받고 검·경에 제대로 수사무마 등을 하지 않았다는 게 탁씨 주장이다. 탁씨는 성씨와 사이가 틀어지자 지난해 8월 성씨의 비위를 검찰에 제보하면서 성씨를 둘러싼 ‘사건 브로커’ 수사가 시작됐다.   반면 성씨 측은 탁씨가 건넸다는 금액보다 5~6억원을 덜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탁씨가 준 돈은 변호사 선임비를 포함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모두 썼다”라는 입장이다. 양 측의 다툼은 다음 달 11일 열릴 성씨 공판에서도 계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앞선 재판에서도 성씨 측은 탁씨 형제를 상대로 돈을 건넬 당시의 구체적 상황을 묻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재판을 지켜본 경찰관들은 한결같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찰을 발칵 뒤집은 사건 당사자들이 형량을 줄이는 데만 급급하다”는 말도 나왔다. 성씨는 탁씨 외에도 20여년간 광주·전남에서 경찰 인사청탁과 사건무마 청탁, 관급공사 로비 등에 개입해온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성씨에게 인사청탁을 하거나 수사 편의를 제공한 관련자들을 수사 중이다. 광주지검 반부패강력수사부(부장 김진호)는 전·현직 검·경 관계자 3명을 구속기소 했으며, 경찰 등 20여명을 입건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경찰청장을 지낸 현직 치안감이 불구속 입건됐으며, 현직 경찰 간부 7명이 직위 해제됐다. 경찰 안팎에선 “현재 수사대상에 오른 전·현직 간부 20여명을 넘어 100여명이 수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성씨의 공판 때 거론된 ‘휴대폰 장부’의 파괴력에도 관심이 쏠린다. 탁씨 측이 “성씨 외에도 여러 명에게 금품을 건넨 장부를 휴대폰에 남겼다”고 진술해서다. 그간 광범위하게 로비를 청탁해온 탁씨 형제의 휴대폰이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 주목되는 이유다. 이미 검찰의 칼날도 경찰 비위를 넘어 지자체와 정관계 등까지 겨누고 있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2023.12.27 00:23

  • [로컬 프리즘] 안희정과 ‘제왕적 리더십’

    김방현 내셔널부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비서였던 문상철씨와 전 경기도 공무원 조명현씨가 최근 각각  『몰락의 시간』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란 책을 냈다. 책은 공통으로 ‘지역 대통령’이라 불리는 자치단체장 통치 기간에 발생한 비리 의혹 등을 폭로하고 있다.   문씨는 586운동권 출신인 안 전 지사가 취임 때부터 여비서 성폭행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과정 등을 소개했다. 반면 조씨는 이재명 지사 시절 경기도청에서 법인카드가 어떤 식으로 유용됐는지를 소상히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좀 더 눈길을 끄는 건 문씨의 책이다. 그건 필자가 과거 충남도를 취재하면서 안 전 지사를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또 당시 취재를 통해 안 전 지사 문제를 지적한 것과 유사한 내용이 일부 있어 반갑기도 했다. 당시 지적한 것은 과도한 ‘의전(儀典)’이나 ‘이미지 연출’ 등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014년 텃밭에서 무를 캐고 있다. 그는 이미지 변신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문씨도 안 전 지사 몰락의 발단으로 의전을 꼽았다. 그는 “처음에는 의전을 불편해했지만, 점차 다양한 보살핌에 익숙해졌고, 철옹성 같은 안정된 의전을 원했다”고 썼다. 비행기를 탔을 경우 수행비서는 안 전 지사가 내릴 때 도왔고, 예방주사도 간호사를 불러 집무실에서 맞는 등 편안함에 대한 추구는 끝이 없었다고도 했다. 결국 안 전 지사 지시로 ‘수행비서 매뉴얼’을 만들게 됐다. 안 전 지사는 외모를 가꾸는 데도 무척 신경 썼다. 몸에 딱 맞는 슈트 핏을 유지하기 위해 안경닦이는 물론 라이터도 갖고 다니지 않았다. 이 바람에 수행비서 호주머니는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안 전 지사의 이미지 연출 행태도 눈길을 끈다. 그는 홍성 도지사 관사 한쪽에 배추·무 등을 심고, 방문객이 올 때마다 “농사가 잘됐다”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가 농사를 지은 건 차가운 철의 이미지를 ‘따뜻한 흙의 이미지’로 바꾸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당시 필자는 ‘농사짓는 안희정’ 모습을 취재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농사는 충남도 농업기술원 박사들이 우수 품종을 골라 심고, 농사까지 지어줬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도지사 이미지 관리에 직원이 동원된 셈이다.   문씨는 안 전 지사처럼 자치단체장의 몰락을 막으려면 견제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법인카드 비리의혹 사건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대통령과 국회 권력 등은 여러 시스템을 통해 집중 견제받고 있다. 반면 자치단체장 권력은 견제·감시 장치가 별로 없다. 지방의회나 지역 언론도 사실상 단체장에 예속됐다. 이에 단체장은 지역에서 ‘왕’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단체장 선거제(1995년)가 도입된 지 30년이 다 됐지만 개선된 건 별로 없다. 많은 자치단체장은 중앙 집중 권력을 지방에 넘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분권 요구에 앞서 견제 장치를 보완하는 게 순서일 거 같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3.12.20 00:12

  • [로컬 프리즘] 미군 주둔 70년, 동두천 시민이 뿔난 이유

    전익진 사회부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 시민이 뿔이 났다. 동두천시 지역발전 범시민대책위원회는 13일 오전 시민 500여 명 등과 버스 18대로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으로 집단 상경해 범시민 총궐기대회를 열 예정이다. ‘정부 약속 10년 미이행’에 항의하는 행사다. 이 자리에는 박형덕 동두천시장과 김성원 국회의원(동두천·연천, 국민의힘), 시·도의원 등도 참여한다. 앞서 박 시장은 지난달 13일 국회 소통관에서 김성원 의원 주관으로 지역발전 범시민대책위 등이 참여한 가운데 ‘70년 안보 희생, 정부는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성명서 발표 및 규탄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   박형덕 동두천시장이 11월 13일 국회에서 동두천시의 ‘70년 안보 희생’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동두천시] 동두천 시민들이 실력 행사에 나선 건 70년간 미군 주둔으로 처절하게 낙후된 지역을 회생시키고자 하는 절박한 사정에서다. 동두천시가 처한 현실을 보면 이들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두천시는 전체 면적 42%가 미군 공여지다. 그것도 대부분 시내 중심부에 있다. 시는 2014년 국방부 장관 면담을 거쳐 이듬해 반환 공여지에 대한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 정부 주도 개발 약속을 끌어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결과가 없다. 게다가 2016년 반환 예정이었던 동두천 미군기지의 반환도 요원한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동두천 지역경제는 사면초가에 놓였다. 시에 따르면 미군 주둔으로 인해 연평균 3243억원(경기연구원 연구)의 경제적 피해를 보고 있다. 이를 70년으로 환산하면 22조원에 이른다. 이 결과 2020년 기준 동두천시의 지역 내 총생산(GRDP)은 1조7793억원으로 2015년(1조7243억원)에 비해 약 500억원(2.8%)가량 증가하는 데 그쳤다. 순위도 경기도 내 31개 시·군 중 30위다.   행안부가 수립한 발전종합계획에 따른 1조5000억원의 민자사업 유치는 미군기지 이전 지연으로 계속 무산되고 있고, 매년 수백억원의 지방세수 손실도 보고 있다. 과거 2만 명의 미군이 사용하던 미군기지를, 4000명의 미군이 잔류하면서 기지 주변 상가는 40% 이상 폐업했다. 고용률은 3년 연속 전국 최하위, 재정자립도 5년 연속 경기도 최하위다. 인구 역시 2016년 9만8000명을 기록한 후 점차 줄어들어 현재 8만8000명이다.   동두천 시민들은 미군기지가 옮겨가고 있는 경기도 평택과 비교하며 정부의 형평성 있는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평택의 경우 시 전체면적의 3%만 미군 기지로 제공했음에도 정부가 특별법을 제정해 지원하는 것을 놓고 역차별이라 주장하고 있다.   가뜩이나 경기도 북부권인 김포·구리의 서울 편입이 추진되면서 동두천 시민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높아져 가고 있다. 동두천시가 기대를 걸었던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추진 동력도 약해지는 상황이다. 동두천 시민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70년간 희생을 치러온 동두천에 대해 지원을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지금 묻고 있다.   전익진 사회부 기자

    2023.12.13 00:26

  • [로컬 프리즘] ‘조선말 큰사전’과 국어사전박물관

    위성욱 부산총국장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국어학자 등이 일제에 항거하며 말과 마음을 모아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었다. 2019년 영화배우 유해진이 주연을 맡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이들의 이야기다. 말모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편찬을 시도한 국어사전 원고로 ‘말을 모은다’는 뜻이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말모이 원고를 바탕으로 은밀히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발각돼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자 33명이 치안법상 내란죄 혐의로 붙잡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1942년 10월 실제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해방 후 완간된 『조선말 큰사전』(1957년)은 우리말 사전의 초석이 됐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에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 3명이 경남 의령 출신이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의 실제 모델인 고루 이극로(1893~1978) 선생, 남저 이우식(1891~1966) 선생, 한뫼 안호상(1902~99년) 선생이다. 이들을 포함해 조선어학회에 포함된 인물 8명이 경남 출신이다.   이 때문에 ‘의병의 고장’ 의령에서는 사실상 ‘문화 의병장’ 역할을 했던 이들의 정신을 기려 “국립국어사전박물관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2020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의령군민회관에서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4차 학술대회도 열렸다.   당시 학술대회 등에 따르면 이우식·이극로·안호상은 조선어 독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연장자이자 ‘만석꾼 부자’ 이우식은 조선어학회 살림살이에 기여했다. 1936~42년 동안 사전 편찬 등을 위해 조선어학회에 1만7190원(현재 가치 약 17여 억원)을 후원했다. 비밀리에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도 조달했다.   이극로는 당시 조선어학회 간사장(현 한글학회장)을 맡아 사전 편찬 작업을 이끌었다. 해방 후 정부 수립(1948년) 때 초대 문교부 장관을 맡아 한글 공교육 초석을 다진 안호상은 사전 집필위원이었다.   이들의 사전 편찬 작업을 계기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한 것이 큰 성과라고 학계는 평가한다. 이를 통해 어문 규범이 제정돼 우리말 표기의 일관성을 지킬 수 있었다.   국어사전박물관 의령 건립은 윤석열 대통령 공약이다. 경남도와 의령군도 핵심사업으로 정해 정부 예산 확보에 애쓰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 건립이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어학회가 우리 말글을 지키고자 했던 그 뜻을 국민의 마음에 이어 모으는 ‘뜻모이’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국민의 마음마다 국어사전박물관이 들어설 때 의령에 박물관 건립도 현실화할 수 있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2023.12.06 00:15

  • [로컬 프리즘] 전과 6범 코인 사기범, 21명 호화 변호인단 꾸렸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12년 전 경찰관 4명을 범죄자로 내몬 사기범이 이번엔 경찰 전체 판을 뒤흔드네요.”   전남경찰청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관이 지난 27일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경찰을 발칵 뒤집은 ‘브로커’에 청탁한 사람이 탁모(44)씨라는 말을 듣고 황당했다”며 “사기범 하나 때문에 그런 수모를 겪고도 구태를 벗지 못한 경찰 책임이 크다”고 탄식했다.   브로커 성모(62)씨에 대한 검찰 수사가 확대되면서 경찰에 ‘삭풍’이 불고 있다. 경찰은 성씨의 수사무마 및 인사청탁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 간부 7명을 최근 직위해제했다. 지난 15일 김모(61) 전 치안감이 숨진 후 성씨 관련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모양새다. 성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경찰 고위직과 친분을 과시하며 각종 로비를 벌여온 인물이다.   브로커 성모씨의 경찰 인사청탁 등을 수사 중인 검찰이 지난 23일 전남경찰청 인사 관련 자료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20년 이상 위세를 떨쳤던 성씨의 존재는 지난 8월 4일 세상에 드러났다. 검찰이 수사 무마를 대가로 18억5400만원을 받은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그를 구속했다. 성씨에게 금품을 건넨 탁씨 또한 코인사기를 벌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상태다.   성씨 사건이 불거지자 경찰들은 “터질게 터졌다”고 입을 모았다. 성씨가 경찰의 인사·사건 청탁에 수시로 개입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성씨를 거치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청탁자 탁씨를 보는 경찰 시선도 착잡하다. 그가 뇌물을 건넨 경찰관 4명은 2011년 10월 검찰에 검거된 바 있다. 당시 탁씨는 온라인 게임 사기로 수사를 받게 되자 담당 경찰관들에게 뇌물을 건넸고, 검찰은 성접대와 수백만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 등으로 이들 경찰관들을 기소했다. 사기 전과 6범인 탁씨는 2004년부터 전국을 돌며 사기 행각을 벌여왔다. 현재는 2020년부터 수십억원대 코인 투자사기를 벌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검·경의 수사를 무마해주겠다”며 돈을 받은 사람이 브로커 성씨다.   ‘브로커’로서 성씨의 오랜 아성을 위협한 사람이 청탁자인 탁씨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지난해 초부터 성씨와 사이가 틀어진 탁씨는 경찰에 “성씨의 비위를 제보하겠다”고 나섰다. 지난해 말에는 검찰에 성씨의 로비 정황이 담긴 휴대전화 녹음파일 등을 제출했다.   경찰 안팎에선 “탁씨가 이번에도 살아남기 위해 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탁씨는 구속된 후 로펌 4곳을 포함해 전관 판·검사 등 변호사 21명을 선임했다. 28일 현재 탁씨의 소송대리인은 로펌 2곳을 비롯해 변호사만 15명에 달한다. 탁씨는 자신의 공판에 앞서 다음달 5일 성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다. 그간 검·경에 폭로했던 성씨의 혐의가 추가로 드러날지도 탁씨의 선택에 달렸다. 탁씨의 입에 검·경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최경호 광주총국장

    2023.11.29 00:51

  • [로컬 프리즘] 누구를 위한 원전 예산 삭감인가

    김방현 내셔널부장 대전에는 원자력 관련 기관이 몇 개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나 원자력안전기술연구원 등 주로 연구 시설이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대전원자력안전 시민참여위원회 산하 환경감시센터(센터)이다. 존립 자체를 놓고 말이 많아서다. 센터는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 주도로 2021년 6월 설립됐다. 시민단체 등은 연구원 등 공공기관을 믿을 수 없으니 직접 나서 시민 불안감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센터에서 주로 하는 일은 원자력연구원 내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와 그 주변에서 발생하는 방사선량 측정 등이다. 또 센터장은 원자력시설 관계자와 소통 활동을 한다고 한다.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내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 원자력 환경감시센터는 하나로 주변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하나로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방사선량 정보는 이미 원자력연구원에서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있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측정값이 대부분 시간당 0.103 ~0.129μSv로 대전에서 30여㎞ 떨어진 논산시 연산면 방사선량과 차이가 없고, 기준치를 넘긴 적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하나로의 열 출력은 30㎿수준으로 발전용 경수로 원자로(1400㎿)의 130분의 1에 불과하다”라며 “연료봉도 수영장처럼 넓은 공간 물속에 담아 관리하고 있어 안전에도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원자력안전기술원도 방사선 수치 등을 수시로 체크한다.   센터 운영비도 논란거리다. 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이곳 연간 운영비는 설립 첫해 2억8000만원이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3억2000만원으로 4000만원 늘었다. 이곳 운영비는 원자력연구원 연구비를 갖다 쓴다. 직원은 센터장과 직원 2명 등 정규직 직원 3명이다. 센터장 인건비도 지난해 7200만원에서 올해 7600만원으로 올랐다. 센터장은 시민단체 출신 인사다. 원자력연구원 측은 “호봉 승급 등을 고려해 오른 것”이라고 했다.   원자력 환경감시센터를 보면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다. 라돈침대나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등 ‘원자력 사태’다. 라돈침대 소동은 2018년 시판된 침대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출발이었다. 이후 침대 18만개를 폐기하는 등 법석이었지만 침대와 폐암이 관계가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침대회사만 피해를 보고 흐지부지됐다. 오염처리수 사태도 비슷하다. 수산업이 금방 망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이하로 나타나면서 조용해졌다. 그 사이 처리수 위험성을 과대 선전한 정치 세력만 이득을 봤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일 민주당은 정부의 내년도 원전 분야 예산 1831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원전 수출 기반 구축 예산 등이다. 나라의 미래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진 결과로 보인다. 원자력 예산을 삭감당한 윤석열 정부와 직원 인건비를 올린 원자력 환경감시센터 처지가 엇갈리는 순간이다. 김방현 내셔널부장

    2023.11.22 00:22

  • [로컬 프리즘] 서울시 김포구와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최모란 사회부 기자 “어이가 없죠. 뒤통수를 맞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어요.”   국민의힘이 추진하는 ‘서울 편입’에 대해 묻자 경기 북부의 한 지자체 관계자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한숨의 배경엔 ‘경기북부특별자치도(북도)’가 있다. 경기도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는 내용의 ‘북도 설치’는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각종 선거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 공약. 역대 경기지사들의 반대 등으로 지지부진했던 정책을 지난해 7월 취임한 김동연 경기지사가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공론화됐다.   9월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설치에 대한 주민 투표를 건의하는 김동연 지사와 염종현 도의회의장. [사진 경기도] 하지만 “서울 근접 도시의 서울 편입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는 여당 대표의 말이 더 강력했다. 경기도 전역이 들썩였다. 남부와 북부 소속 여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던 김포시는 물론 북도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구리시마저 서울 편입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타부타 입장을 밝히지 않던 북부 유일의 100만 인구 특례시인 고양시까지 “수도권 전체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관점에서 보면 수도권 재편 논의는 의미가 있다”며 “시민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하남·광명·안양시 등에선 일부 주민들을 중심으로 서울 편입 움직임이 일고 있다.   김포와 구리·고양시의 변심에 북도 추진에 앞장섰던 양주·파주·포천·의정부·남양주·동두천시와 가평·연천군 등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고양시를 제외한 9개 시·군 단체장이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북도 설립’에 공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각 시·군의회는 물론 경기도의회와 여야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북도 설립에 힘을 보탰다.   경기도는 지난 9월 행정안전부에 북도 설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공식 건의한 상황. 북도 설립에 대한 여론의 불을 지펴야 하는 시점에서 ‘서울 편입’이라는 찬물이 퍼부어진 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자체 관계자는 “‘북부 주민들이 잘사는 도시를 만들자’며 경기도와 각 시장·군수들이 여야를 떠나 의기투합했는데 이탈하는 지자체가 나오면서 술렁이는 분위기”라며 “서울 편입이 현실화되면 사실상 경기북도는 추진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기도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오후석 경기도 행정2부지사는 “서울 편입으로 시(市)가 구(區)가 되면 재정 규모는 물론, 지자체 권한과 농어촌자녀 대입 특별전형 등 시민 혜택이 축소되는 등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소속인 유정복 인천시장과 보수 성향의 임태희 경기교육감도 각각 “실현 가능성 없는 정치쇼” “후다닥(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반대 입장을 냈다. 경기도 여론조사도 도민 66.3%가 서울 편입에 반대했다.   그렇다고 서울 편입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치가 아닌 지역 주민과 지역 경쟁력 향상 등을 염두에 두고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최모란 사회부 기자

    2023.11.15 00:24